지난해 완성차·부품업계에 직격탄을 안긴 차량용 반도체 부족 사태는 신차 출고 지연과 자동차 생산량 감소로 이어졌다. 정부는 차량용 반도체 품목에 긴급 지원을 하고 미래차용 핵심 반도체 개발과 공급망 안정화를 위한 ‘K반도체’ 전략을 세우기 시작해 현재 가시적인 성과를 내고 있다.
그중 하나가 차량용 반도체의 성능 검증을 지원하는 ‘차량용반도체성능평가인증지원’이다. 산업통상자원부와 한국산업기술진흥원(KIAT)이 지원하고 한국자동차연구원(KATECH)이 총괄, 주관하는 이 지원사업에 올해 30개 기업이 참여해 차량용 반도체 국산화에 성공하면서 국내외 시장 매출 확보가 구체화되고 있다.
차량용 반도체 시장은 반도체 산업 중에서도 안정적인 미래 먹거리로 꼽힌다. 미래차의 전장화, 자동화로 차량용 반도체 몸값은 점점 높아지고 있다. 내연기관차에 들어가는 반도체 수가 약 200개인 반면에 자율주행차에는 2000개 이상의 반도체가 필요하다. 아직까지 우리나라의 차량용 반도체 국산화율은 5% 이내 수준으로 추정된다. 세계 5위 자동차 생산국이자 세계 1위 메모리반도체 강국인 한국이 차량용 반도체는 95%를 해외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차량용 반도체 수급난
가장 큰 원인은 ‘내력 부재’
지난해 1월부터 시작된 반도체 수급난은 내외부적으로 여러 복합적인 원인이 작용했다. 먼저 수요예측 실패를 꼽을 수 있다. 2020년 코로나19가 급속히 확산하면서 자동차 업계는 신차 수요가 감소할 것으로 예측해 반도체 재고를 줄였다. 하지만 차 수요는 예상보다 빠르게 회복됐고 가전, 스마트폰 수요가 동시에 증가하면서 수급난의 단초가 됐다.
이러한 가운데 지난해 상반기 미국 텍사스의 기록적 한파로 반도체 공장이 가동을 멈추는 상황이 발생했다. 이 지역에는 삼성전자, 인피니언, TI 등 전 세계 반도체를 공급하는 공장이 밀집해 있다. 하반기에는 동남아발 반도체 후공정 셧다운 등으로 반도체 글로벌 공급망 불안이 장기화되는 조짐을 보였다. 지난해 세계 완성차 기업 대부분이 생산량을 큰 폭으로 줄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이 같은 공급망 불안은 결국 국내 차량용 반도체 산업 생태계가 얼마나 미비한지를 드러냈다. 우리나라 자동차 업계의 차량용 반도체 해외 의존도는 90% 이상이다. 자율주행차용 AP(application process)와 전장시스템을 제어하는 반도체인 MCU(microcontroller unit)의 경우 100% 수입하는 실정이다. 차량용 반도체 산업이 국내에서 거의 성장하지 못한 이유로는 다품종 소량 생산으로 이익률이 낮아 자발적인 생산과 투자 확대가 부족했던 것으로 분석된다.
몸값 커지는 차량용 반도체,
진입 장벽 높아
차량용 반도체 시장은 두 자릿수대의 고성장을 유지해 왔다. 전체 반도체 시장의 약 9.6%를 차지하는 가운데 시장조사 기업 옴디아에 따르면 2021년 500억 달러에서 2025년에는 840억 달러의 시장 규모를 형성할 것으로 예상된다.
세계 주요국들 역시 공급망 안정화와 첨단 기술 개발을 위한 다양한 방안을 강구 중이다. 완성차 기업이 반도체 기업과 직접적인 협력관계를 맺고 제휴하거나 현대자동차 도요타 테슬라 폭스바겐 등 다수 완성차 기업은 자체 개발 후 공급하는 전략 등을 추진하고 있다.
차량용 반도체 산업은 진입장벽이 높다. 높은 수준의 신뢰성, 안전성, 품질 확보가 필수적이기 때문에 평가인증에서 높은 등급이 요구될 수밖에 없다. 또 품질 보장을 위해서는 국제자동차전담기구(IATF)의 인증을 취득해야 한다. 평가·인증 시 기업은 기술보안과 시간이 가장 중요한 요건이기 때문에 글로벌 자동차 기업의 경우 별도의 평가·인증 기업과 협력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우리 반도체 기업이 이런 절차를 거쳐 시험·평가·인증을 활용하는 데 어려움이 따를 수밖에 없다.
차량용 반도체 생태계
악순환의 고리 끊어내야
국내 차량용 반도체 시장 경쟁력은 그야말로 미미한 수준이다. 글로벌 차량용 반도체 매출 100개 기업 중 국내 기업은 종합 반도체 기업 5개, 팹리스(반도체 설계) 기업 3개로 총 8개 기업을 보유하는 데 그친다.
따라서 국내 팹리스 기업이 차량용 반도체를 개발하더라도 완성차 OEM이 요구하는 인증 수준을 파운드리 업체에서 제공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국내 대기업들이 시장 확대를 위해 노력 중이지만 아직 산업 영향력은 미약하다. 중소기업은 연구개발(R&D) 투자와 역량 부족으로 한계에 직면해 있다. 완성차·부품 업체는 검증된 해외 반도체를 선호하고 국내 반도체 시장에 대한 인지도와 신뢰가 부족하다. 개발 경험을 쌓을 수 없는 반도체 업체는 경쟁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는 게 국내 차량용 반도체 시장의 현주소다.
자립화 촉진하는
‘차량용반도체지원사업’
정부는 초강대국 전략을 통해 수요-공급기업 협력모델을 발굴하고, 차량용 반도체 자립화를 위한 공급망 내재화, 산업생태계 경쟁력 강화 등을 이뤄내겠다고 밝혔다. 그중 차량용반도체성능평가인증지원은 올해부터 2024년까지 3년간 집중적으로 지원이 이뤄진다. 차량용 반도체 단품-모듈-시스템 단위로 이어지는 산업 전 주기에서 평가·검증을 지원하고 반도체 공급 기업의 기술경쟁력을 강화해 안정적인 산업생태계를 구축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올해 97억 원을 시작으로 2023년에는 103억 원, 2024년에는 50억 원의 국비 등 총 250억 원을 투입해 국내 자동차 산업의 수급 안정에 기여하고 해외 의존적 자동차 반도체 산업의 기술자립 기반을 마련한다는 방침이다. 지원은 크게 반도체 개발·생산의 전 주기에 따라 4가지 분야에서 이뤄진다. 단품 평가·인증에서는 국제표준에 기반한 평가·인증을 지원해 차량용 반도체 성능과 신뢰성 개선을 위한 가이드를 제시한다. 모듈 성능 평가에서는 성능·신뢰성 평가를 통해 모듈 단위의 성능 개선을 지원하고 신뢰성에 기반한 최적 설계 가이드를 제공한다.
올해 30개 기업 참여해
국산화와 수출 성공
현재 위와 같은 지원을 통해 올해 총 30개 기업이 인증지원 사업에 참여했다. 반도체 단품, 모듈 제작 기업과 시스템 제조, 팹리스 기업 등 다양한 유형의 기업들이 참여해 단품 평가·인증, 모듈 성능 평가, 완성차 기반 평가 및 전자파 평가 등 124건의 평가를 지원받고 있다.
집적회로(IC) 기반의 능동 전자파 차단 솔루션을 제공하는 기업 이엠코어텍㈜은 능동 EMI 반도체 분야에서 신뢰성 시험을 진행했다. 이엠코어텍은 세계 최초로 전자파를 차단하는 반도체(EMIC)를 개발해 완성차 업체 등에 양산 적용을 목표로 현장 기술검증(POC)을 진행 중이었다. 한국자동차연구원은 환경 신뢰성 테스트를 지원해 자동차 내부 극한 환경에서 신뢰성 개선 포인트를 찾아냈고, 실제 자동차 내부 능동 EMI 저감용 IC의 국산화에 성공하고 판로를 개척할 수 있었다.
에스오에스랩은 차량용 라이다 핵심 부품인 3차원(3D) 라이다 센서에 대해 SPAD 환경평가 지원을 받았다. SPAD는 빛의 단일 입자까지 감지할 수 있는 픽셀 구조의 라이다 센서다. 자율주행차용 라이다 센서는 3D 이미지 센서 시장의 주 원동력으로 꼽히기도 한다. 에스오에스랩은 한국자동차연구원의 테스트 지원을 시작으로 회사 자체 신규 개발품인 Tx 드라이버와 최종 완제품인 차량용 라이다 신뢰성 평가지원을 통해 완성차 시장으로 국산화를 달성했고, 이를 기반으로 신규 시장 진입과 기업 매출 증대가 예상된다.
고효율 전력반도체 소자를 설계, 판매하는 ㈜파워큐브세미는 차세대 SiC(실리콘 카바이드, 화합물 반도체 재료) 파워반도체 관련 신뢰성시험·특성평가·고장분석·열분석 기술 지원을 받고 있다. 이를 통해 3.3kW, 6.6kW급 완속 충전기에 활용되는 650V·70A급 고내압 반도체 소자(Si SJ MOSFET)를 중국 전기차 기업에 수출하는 성과를 거둬 올해 40억 원 매출, 2023년에는 150억 원 이상의 매출을 올릴 것으로 보고 있다. 현재 차량용 반도체에 요구되는 AEC-Q101 인증 확보를 준비하고 있으며 국내 시장 연간 100억 원, 해외시장 연간 200억 원가량의 매출 확보를 기대하고 있다.
한국자동차연구원 신뢰성·인증기술연구소 신뢰성기술부문의 사공현철 박사는 차량용반도체성능평가인증지원에 대해 “미래차 분야 시장선점을 위한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는 가운데, 신뢰성 확보를 위한 인증도 늘어나고 있는 상황”이라며, “중소중견 차량용반도체 기업의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고 앞으로 기업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여 더욱 많은 인증을 확보할 수 있도록 노력해나가겠다”고 밝혔다.
태현지 기자 nadi1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