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격적이었던
포르쉐 타이칸 시승

2021년 3월이 되면서 부터는 평일 주말 할것 없이 타임푸어와 같은 삶을 살고 있다. 작년까지에 비해 신차를 시승하기 위해 시간을 내는 것이 훨씬 어려워진 상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번 아우디 E-tron GT와의 만남으로 실제 타이칸의 주행 질감에 대한 궁금증이 더욱 심해져, 어렵게나마 잠깐 짬을 내서 이 차를 시승하게 되었다.

제원상으로는 비싼 가격과 대용량의 배터리에 미치지 못하는 주행가능거리로 초기에 많은 실망을 주었던 차량이지만, 동 차량은 그동안 출시된 전기차는 거의 모두를 경험해 보았던 나에게 30분도 되지 않는 짧은 시승동안 무척 많은 충격을 주었다. 숫자로 나타낼 수 있는 제원(specification)은 실제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다는 것이 이런 느낌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는 순간이었다.

아래는 시승차와 동일한 사양의 차량 후드에 붙어있는 공식 주행가능거리 스티커이다. 대용량 배터리를 장비한 이 차의 주행거리가 이렇게 짧다면 (예, 저온, 도심 137km) 누구라도 부정적인 선입견을 가질 수 밖에 없다. 겨울에 구형 아이오닉보다도 못한 주행가능거리라니. 이 페이퍼 스펙이 문제였다.

 

 

사실, 이 차량은 뉘르베르크 노드슐라이페를 7분 42초에 주파한다. E 세그먼트 설룬의 외형을 같춘 무겁디 무거운 전기차의 랩 타임으로는 믿어지지 않는다. 위키피디어의 기록 테이블을 캡춰한 아래 그림을 보자. 무르시엘라고 LP640, 멕라렌 벤츠 SLR, 콜벳 6세대 Z06 등의 차량이 보인다.

 

 

한마디로 이정도 랩 타임을 보이는 차량은 일반인이 일상용으로 매년 2만km씩 편하게 타고 다닐수 있는 차량의 분류에는 원래 들지 않는 영역이라는 것이다. 고급 휘발유를 넣고, 서울 시내 연비 5km/l 이하를 감내하며, 딱딱한 승차감을 견뎌야 하고, 몇 천 km만 타더라도 큰 돈을 써서 유지를 해 주어야 하는 슈퍼카의 영역이다.

그런데, 파워큐브 꽃아서 타면 연간 보험료만 내고 따로 유지비 들어갈 것도 없는, 2억원 정도면 살 수 있는 이 세단은 공도형 모델 그 자체로 이런 슈퍼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심지어, 온보드 비디오를 보면, 몇 초 정도는 더 쥐어짤 수 있는 여지도 보인다. 듀얼 모터 사륜이며 무거운 중량 때문에 상당한 언더스티어 셋팅인 것을 알 수 있는데, 이 때문에 몇몇 코너 정점(apex) 직전에서의 속도가 통상적인 슈퍼카들의 레코드 주행에서보다 낮음을 알 수 있다. 타이칸은 결국 2-3년 내 마이너한 업데이트를 거치면 7분 20초대를 찍을 수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차량은 다양한 성능 영역(envelope)을 실제 환경에서 경험해 보아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타이칸의 시승에서 얻는 충격은, 뉘르 랩타임 7분대 중반의 전기차, 포르쉐가 처음으로 만든 전기차가 대체 어떻게 이렇게 불가능할 정도로 많은 요소에서 완벽함을 성취하였는가에 대한 놀라움으로 시작되었다.

자동차의 실제 성능을 이루는 다양한 파라미터는 일정 정도에서는 다소간 현실적인 제약 조건에 맞추어서 타협한 채로 개발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반대되는, 따라서 양립하기가 어려운 파라미터들이 존재하는데 예를들어 요철에서의 부드러운 승차감, 우수한 정숙성과 젤리 같은 시트는 극단적으로 타이트한 종, 횡방향 거동을 보장하는 섀시 셋팅과 양립하기가 어렵다. 한계 주행에서의 강력한 롤링 억제를 얻기 위한 단단한 하체 셋팅은 급격한 거동에서의 불안정한 테일을 초래할 가능성이 높다. 로터스 엘리스에서 느낄 수 있는 민첩함을 얻기 위해서는 많은 풍요를 희생해야 하고, 대배기량 GT 차량은 아무리 출력/중량비가 우수하더라도 로터스 엘리스에서 느낄 수 있는 경쾌함을 맛보기 어렵다.

 

 

바닥 배치형 배터리와 듀얼 모터를 활용한 전기차의 질량 모멘트 특성은 어느 정도는 이와 같은 내연차량의 타협을 개선할 수 있는 근본적인 장점이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지금까지의 배터리 전기차량에서 예컨대 효율성을 보장하기 위해서 NVH를 위시한 거주성을 희생시키거나, 플라스틱을 달고 다니는 느낌이 나는 저구름저항 타이어를 장비한다거나 하는 방식으로 일정 수준에서 성능의 희생이 이루어 져 왔다. 구형 전기차들은 말할 것도 없고, 어느정도 최신 모델로서는 예를 들어 우수한 하체의 거동을 보이는 테슬라 모델 3의 경우에도 컴포트 성능은 상당부분 희생되어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이도 저도 아닌 셋팅이 되어버리는 비극도 있는데, 메르세데스 벤츠의 EQC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포트폴리오 비중 조절에 실패한 것 처럼, 한마디로 컴포트 성향도 아니고 그렇다고 고성능도 아니면서, 또 효율성이 좋지도 못하게 되는 것이다.

타이칸은 이런 점에서, 이전까지의 전기차가 시도했던 방향과는 완전히 다른 개발 방향의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효율성을 다소간 희생하는 대신에, 고급, 고성능 차량이 추구할 수 있는 모든 요소를 극단적으로 끌어 올리고자 하는 노력을 시도한 것이다. (심지어 실제 주행 상황에서는 효율성이 그다지 나쁘지도 않다.)

 

 

다른 전기차들과 현저하게 대조되는 이러한 특성은 시승을 시작하고 10분도 채 되지 않아서 모두 느낄 수 있었다. 987이나 981 박스터 S 모델의 시승에서 경험했던 신뢰할 수 있는 차량의 거동, 차를 믿고 마음놓고 원하는 방향으로 던져넣을수 있겠다는 느낌은 기본이었다 (이런 느낌은 과거의 911보다 훨씬 낫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차량에서는 극단적인 안락함과 쾌적성이 동시에 보장되었다.

공도에서, 남의 차를 빌려 타는 짧은 시승이기에, 한계 주행을 해볼 수는 없었다. 그러나 국내법을 저촉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차량을 운행한다고 할 때에, 타이칸은 우수한 스포츠카가 갖추어야 할 모든 점을 만족한다. 전기차이기에 가능한 우수한 응답성과 토크 특성에 2단 변속기를 통한 고속 주행에서의 떨어지지 않는 가속, 그리고 고급 포르쉐에서 기대할 수 있는 적절한 주행 질감(ride quality)과 전체적인 조립 품질 등, 이 차의 시승에서 흠을 잡을 수 있는 요소는 거의 없다.

 

 

사실, 차량의 제원과 사진상의 외형에서 기대한 것은 ‘전기 파나메라’ 였는데, 실제로 경험해보니 이 차는 파나메라와는 완전히 달랐다. 타이칸은 박스터와 같은 거동이 가능한, 4륜 911이면서, 파워트레인 메인터넌스가 필요없는, 그러고도 파나메라 만큼의 적재 공간을 확보할 수 있는 그야말로 먼치킨인 것이다. 타이칸을 스펙만으로 보신 분들께는 진심으로 시간을 내어 시승을 권한다.

결국, 일상용으로 사용하기에 충분한 후석 공간과 트렁크 공간은 이 차의 스티커 가격을 더욱 더 저렴해 보이게 만든다. 세컨 카로서 운용해야 하는 슈퍼카가 아니라, 1인 다역이 가능한 슈퍼카이기 때문이다. 람보르기니 우라칸이 없어서 못파는 이유와도 비슷한 것 아닐까. 타이칸이 무척 잘 팔릴 수 밖에 없다. 만약이라도 시승을 한다면, 계약을 피하기가 어려울 것 같다.

 

 

시승을 마치고 아이오닉 EV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생각을 해 보니, 2016년 아이오닉을 구입한 이후 수십 종류의 차량을 시승했지만 그 중 정말로 구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이르게 된 차량은 타이칸이 최초라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 시승을 마치고 아이오닉 EV를 타고 나오면서 드는 생각은.. ‘음… 아이오닉이랑 결과적으로는 똑같은.. 전기 차네?’ 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절대적으로는 상당히 경쾌하고 탄탄한 아이오닉 EV가 무척 헐겁고 덜컹거리고 둔하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전기차는 그 자체로 주행 특성이 좋을 수 밖에 없기에 과연 신차에서 차별화된 상품성 확보를 제조사들이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궁금했었다. 그런데, 포르쉐는 차 자체를 아주 완벽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숫자로는 드러나지 않는 독보적인 상품성을 창조해 낸 것 같다.

 

감격한 박사
전기 모빌리티에 관한 사변(思辨)과 잡설(雜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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