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차 시대,
현대차 노조가 변화하는 이유
오늘은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을 살펴볼까 합니다. 한국 자동차 산업에서 노조 문제는 핵심 이슈 중 하나입니다. 현대차 노조를 이야기해 보려는 것은 최근에 현대차 노조가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을 만난 일이 계기입니다. 그리고 기아자동차, 한국GM 등과 마찬가지로 민주노총 금속노조 소속인 현대차 노조가 유독 남다른 행보를 보이는 이유를 한번 짚어보려는 뜻이기도 합니다. 전기차를 비롯한 미래차 시대가 불러오고 있는 거대한 변화에서 노조도 결코 자유롭지 않다는 점, 그리고 완성차 노조 가운데 가장 큰 현대차 노조가 이런 문제와 노조에 대한 비난 여론의 심각성을 발 빠르게 인식하고 있다는 점 등이 중요한 이유 아닐까 하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정의선 회장 직접 만난
현대차 노조
지난달 14일 현대차그룹 회장에 취임한 정의선 회장이 취임 16일 만인 지난달 30일 울산공장에서 현대차 노동조합을 만났습니다. 정 회장은 이날 현대차 울산공장 영빈관에서 이상수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금속노조 현대차지부장(노조위원장)과 오찬을 함께하며 면담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참석한 ‘친환경 미래차 현장방문’ 행사가 끝난 뒤 자연스럽게 이뤄진 자리인데요. 회장 취임 직후에 나왔던 노조의 3자 회동(회장-대표이사-노조위원장) 제안에 정 회장이 응한 셈입니다. 이 자리에서 오고간 얘기를 떠나서, 이런 자리의 성사 자체가 가지는 의미가 크다는 것이 자동차 업계의 얘기입니다. 정몽구 명예회장이 2001년에 당시 이헌구 현대차 노조위원장을 만난 이후 현대차그룹 회장이 노조와 공식적으로 회동한 것은 이번이 처음일 정도로 이례적인 자리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자리가 만들어질 수 있었던 배경에는 현대차 노조의 변화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현대차 노조는 올해 임금 협상에서 11년 만에 기본급을 동결하는 데 합의했습니다. 매년 임금 협상 과정에서 반복됐던 파업 없이 2년 연속 무분규 합의를 이끌어 낸 것입니다. 현대차 노사는 국내 공장 미래 경쟁력 확보와 미래 자동차 산업변화 대응 등의 내용을 담은 ‘노사 공동발전 및 노사관계 변화를 위한 사회적 선언’을 채택하기도 했습니다.
현대차 노조의 변화는 무분규 합의에 그치지 않습니다. 이날 자리에서도 얘기가 나온 것처럼 현대차 노조는 최근 현대차의 품질 문제에 대해서도 함께 해결하자며 적극적으로 나서는 모습입니다. 사실 제네시스 GV80 디젤 엔진 문제를 비롯해 중대한 수준의 품질 문제는 현대차 노조의 주축을 이루는 울산공장 근로자들의 잘못이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자동차 설계 자체의 문제가 더 크다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을 노조가 “품질 문제에는 노사가 따로 일 수 없다. 연구개발과 품질설비투자를 대폭 확대해 달라”는 의견을 내는 것은 확실히 과거와 다른 모습입니다.
‘실리 성향’ 현대차 노조
함께 사는 길로
이런 변화에는 올해 출범한 ‘실리 성향’ 노조 집행부의 영향이 클 수밖에 없습니다. 지난 휴일차담에서도 짚어 보았지만 현대차의 이번 노조 집행부는 ‘함께 사는 길’을 만들어가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른바 ‘귀족 노조’라는 비판 속에 울산에서마저도 현대차가 외면 받는 것 아니냐는 위기의식을 바탕으로 기존 노조의 이미지를 바꿔야 한다는 노력입니다. 그렇게 해야 회사가 살고 그래야 노조도 살 수 있다는 것이지요.
올해 기본급을 동결했을 뿐더러 매년 임금협상의 최대 이슈인 성과급도 상당 부분 축소한 합의안을 내놓고 노조는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합의안이 조합원 요구에 부합하지 않는 걸 안다. 하지만 정치, 사회, 경제적 여건이 최악이다. 이 합의안 부결시키고 파업에 나서면 사회적으로 매도당한다. 협력업체와 자영업자가 죽을 지경인데 5만 조합원 이익을 위해 총파업에 나서는 것은 스스로 무덤을 파는 것이다.” 현대차는 글로벌 기업이지만 여전히 내수 시장의 중요성이 아주 큰 기업입니다. 국내에서 노사 관계 때문에 비난 받는 상황이 계속 이어져서는 노조도 큰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인식이 느껴지는 목소리입니다.
미래차 시대, 위기 속에
제조 과정도 급변
국내 강성 노조를 대표하고 노동계 전반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평가를 받는 현대차 노조의 이런 변화가 갑자기 만들어졌을 리는 없습니다. 현대차는 여전히 국내 시장을 지배하고 있는데… 현대차 노조는 왜 이렇게 생각을 바꾼 것일까요. 그 이유에서 ‘미래차’라는 요소를 빼놓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노조의 변화를 이끌어 내는 하나의 배경은 산업과 기업 환경의 거대한 변화라는 것입니다.
다소 시간이 걸릴 것 같았던 전기차 시대가 성큼 현실화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전기차의 중요성이 점점 더 커지면서 기존의 자동차 산업은 큰 변화를 마주하고 있습니다. 내연기관차 시대의 ‘패스트 팔로워’였던 현대차에게는 이런 상황 자체가 ‘위기’입니다. 막대한 규모의 내연기관차 생산 설비와 인력을 유지하면서 전기차 시대에도 대응해야 합니다. 현대차의 브랜드 경쟁력이 독일 프리미엄 브랜드만큼 구축돼 있는 것도 아닙니다.
경영진이 이런 ‘위기’를 강조하기만 해도 노사 관계에서 조금이라도 더 주도권을 쥘 수 있는 상황인데 현재의 미래차 패러다임 변화를 이끄는 것이 자율주행차가 아니라 전기차라는 점도 노조에게는 악재입니다. 내연기관 기반의 자율주행차라면 노조로서도 별 문제가 없을 수 있습니다. 전장 부품의 증가 등이 수반되는 자율주행차 시대에 완성차 생산공장의 인력은 별 문제 없이 유지되거나 오히려 더 늘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전기차는 사정이 다릅니다. 엔진과 변속기를 비롯한 내연기관 계통의 복잡한 부품 체계가 사라집니다. 이에 따라 20~40%에 이르는 노동력 감소가 수반될 것이라는 분석이 이미 나온 바 있습니다.
그리고 회사의 경영진은 모터와 인터버·감속기 등이 결합된 전기차 핵심 부품 ‘PE모듈’ 생산 등을 비롯한 완성차 제조의 구조 자체에서 변화를 시도할 수 있는 시기입니다. 엔진·변속기를 대체하는 주요한 전기차 부품·모듈을 굳이 현대차가 직접 생산하지 않아 되는 식의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는 뜻이고 실제로 이런 변화도 진행 중입니다. 현대모비스 등이 이런 역할을 넘겨받는 모습이 현실화되는 상황에서 노조는 어떤 식으로든 대응을 해야 할 상황이 아닐까 싶습니다.
한국 대표 노동조합의
노련한 선택?
이런 배경에서도 노조는 다양한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오래된 무기인 강력한 투쟁으로 일감과 임금을 지키는 전략도 물론 선택지 중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현대차 노조는 그런 길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선택의 이유 가운데 중요한 것은 물론 앞서 얘기한 실리 성향 노조라는 점일 수 있는데요. 유독 현대차에서 이런 흐름이 나타나는 것도 눈에 띕니다. 개인적으로는 노조 활동에 ‘규모의 경제’가 있는 것 아닐까하는 생각도 해봤습니다. 국내 최대 규모인 5만 명의 조합원을 거느리고 노동 활동을 이끌어 왔다는 자부심을 가진 곳이 바로 현대차 노조입니다. 노조 활동 내부에서 그 나름대로 학습과 토론을 벌이고 내부의 계파들이 집행부로 올라서기 위한 경쟁을 펼치기도 합니다.
그런 현대차 노조에서 변화의 움직임이 보이는 것은 이번 집행부만이 아닙니다. 현대차는 지난번 하부영 지부장이 이끌던 집행부에서도 “전기차 시대에 고용 충격이 아주 클 수 있다”는 사실을 스터디하고 조합원들에게 직접 알리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하부영 전임 지부장은 퇴임을 앞두고 현대차 노조가 그동안 이기적인 ‘부자되기 운동’에 너무 치중하면서 사회적 고립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는 뼈아픈 진단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연이은 2대의 집행부 모두가 ‘미래차’라는 물결에 섣불리 저항하기보다는 어떻게 받아 안으면서 대응할 것인지를 고민하는 모습은 그래도 현대차 노조이기에 가능한 것 아닐까 하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지금과 같은 사회 분위기에서 임금 인상에 골몰하면서 미래차로 인한 변화까지 깃발 들고 파업하며 거부하는 노조를 받아줄 곳은 없다는 냉정한 판단을 할 수 있는 판단력과 그에 따른 실행력을 갖춘 노조 아니겠느냐는 얘기입니다.
생존 경쟁 속의 자동차 노사,
어떤 길 걸을까
기업은 늘 ‘위기’를 얘기합니다. 세계무대에서 수많은 해외 기업과 경쟁하면서 늘 커다란 어려움들을 헤쳐 나가고 있는 것은 사실이겠습니다. 하지만 지나치게 위기만 강조하는 것은 때때로 과장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자동차 산업의 변화를 둘러싼 담론은 그런 종류의 과장은 아닌 것 같습니다. 바야흐로 전기차 시대를 맞이하면서 테슬라 같은 기업의 등장이 있는가하면 몸부림치는 기존 내연기관차 기업들,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글로벌 완성차 업체의 시행착오까지… 엇갈린 소식들이 들려옵니다.
내년 초 ‘아이오닉5’를 내놓는 현대차처럼 전기차 전용 플랫폼 차량을 준비하는 기업들은 정말로 사활을 걸어야 하는 승부를 앞두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미국에서 조 바이든 대통령의 시대가 열리면 이런 전기차의 물결은 더 빨라질 수도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현대차는, 그리고 기아차를 비롯한 또 다른 국내 완성차 업체들은 앞으로 어떤 길을 걷게 될까요. 그동안 그랬던 것처럼 불안한 노사 관계라는 악조건 속에서도 나름의 성취를 만들어내는 흐름이 이어질 수도 있겠지만 녹록치만은 않아 보이는 것도 사실입니다.
최근 기아차는 파업 준비를 마쳤습니다. 그리고 한국GM 노조는 실제로 부분 파업을 벌이면서 회사 측이 최근 노조에 제시했던 투자 계획 철회 가능성을 내비치기도 했습니다. 자동차라는 제품을 생산하는 과정에서의 부가가치 전반을 완성차 회사가 통제할 수 있던 흐름이 전기차로 인해 바뀌는 것 같은 시대입니다. (전기차에서 가장 가격이 비싼 배터리를 밖에서 사와야 하는 상황입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노사 관계라는 이슈 자체가 중대한 걸림돌이 되는 기업 혹은 사업장이 이런 격변기에 얼마나 경쟁력을 가질 수 있을까하는 의문이 커지는 시점이기도 합니다. 현대차라고 해서 지금과 같은 ‘훈풍’이 언제까지 이어질 것이라고 기대하기는 힘듭니다. 그리고 다른 곳이라고 해서 적절한 ‘밀당’ 후에 서로 큰 타격 없는 타협점을 찾지 못하리라는 법도 없겠습니다. 각 기업의 노조와 조합원들도 얼마나 큰 변화가 밀어닥치고 있는지 정도는 알고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으로, 현명한 선택들을 기대해 봅니다. 가장 많은 조합원들을 거느리고 있으면서 나름대로는 열심히 현재와 미래를 연구해 본 현대차 노조가 보여주고 있는 선택이, 좋은 참고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김도형 기자 dodo@donga.com